맘스텝-유아용품

저러니 정말 악역이라도 된 거 같았다. 황태자를 제 맘대로 굴리는…… 비유가 아니라 진짜 데굴데굴 굴려서 제 베개 삼는 악역. 저것 때문에 우리 샤샤에게 불이익이 오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던 그때였다. “잘 지내는 것 같군.” “네……?” “르델로도 편안해하는 거 같고. 역시 또래끼리 둔 건 잘한 일인 것 같군. 배동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저런 격 없는 사이도 괜찮을 거 같아.” 자신의 아들이, 일국의 황태자가 될 아이가 저런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 화낼 줄 알았건만 도리어 그는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하하…… 배동이 저래도 괜찮은 거죠?” 괜스레 민망함이 몰려왔던지라, 말을 슬쩍 돌렸다. 황족이나 고위 귀족들의 말동무인 배동은 보통 예법을 어느 정도 배운 아이들로, 소소하게 티타임을 가지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친분을 쌓는 게 보통이었다. 워낙 특수한 상황인지라 그저 말동무 정도가 되어 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황태자를 베개로 쓰는 배동이 어디 있냐고…….’ “괜찮다. 예법에 얽매여 있진 않으니까.” “그래도…….” “나 때도 그랬어.” “리안도 배동이 있었어요?”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뱉어 낸 질문이었는데, 리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래. 있었지. 모든 일의 시작을 알려 주었던 아이가.” “아.” “내가 아닌 형님의 배동이긴 했지만, 수준 떨어진다며 형님은 어울리려 하지 않았고, 덕분에 내 친우가 되었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요?” “배동이었던 그 아이가 자신의 동생을 데려오면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으니까.” 씁쓸하게 웃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안의 배동은 에반 공작님 아니었나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그런 건 잘 아나 보군?” “당신의 친구는 그분밖에 없다고 이야기를 들어서…….” 성격이 괴팍하여 황제의 곁에는 친구가 없다고. 그렇게 소문이 나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아. 그렇군.” “그러면 배동이라는 분이…….” “그래. 에반이었지. 하지만 형님은 에반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어. 어린아이라 해도 공자였기에 예법은 지켰지만, 공작가를 이을 하나뿐인 후계가 얼마나 자존심이 셌겠나. 심지어 저 아이들보다 더 어릴 때 궁에 들어왔는데.” “너무 어린데요?” 일곱 살도 아직 어린 나이인데 그보다 더 어릴 때라니. “어마마마께서 일찌감치 인맥을 쌓으라고 벌인 일이었는데, 형님은 영 못마땅해하셨지. 리안 또한 공작가에서 예쁨만 받고 자라다가, 여기서는 눈치를 봐야 했으니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야. 그런 것들이 형님 눈엔 거슬렸던 모양이고.” “그렇구나.” “결국 배동이라고 들어온 아이를 내쫓을 순 없고, 형님은 싫다 해 버리니, 어머니는 망가진 장난감 쥐여 주듯 내게로 보내셨다. 나와는 잘 맞았어. 딱히 예법은 생각지 않고 잘 뛰어놀았으니까.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에반이 제 동생을 데려오면서 많은 것들이 변하긴 했지만.”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때였다. 열심히 르델로를 굴려 가며 제 베개 삼던 샤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펴네……. 살쪘나 바……. 배가 볼록 튀어나와써…….” 샤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르델로도 함께 일어났다. 샤샤가 불편해한단 걸 알아차린 건지 르델로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 살쪘어? 나 불편했어?” 르델로는 자나 했는데, 아무래도 일어나 있었던 모양이다. 샤샤의 말에 바로 반응하는 걸 보면. “응. 돼지 살쪘어.” “조절 좀 할까?” “아니. 지금이 괜찮아. 뭐. 배가 뚠뚠하면 다리에 누움 돼!” “그러네!” 샤샤가 헤벌쭉 웃으며 대답하자 르델로는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까지는 정말 사이가 좋지 않다고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래도 꽤 서로를 생각하는 사이가 된 듯싶었다. 그저 이곳에 하나뿐인 또래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확실히 쉽게 친해지는 듯했다. ‘일찍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큰 효과가 있는데…….’ 소설 속의 샤샤는 이미 상처받을 대로 받아 버린 상황이었고, 그 상태에서 르델로를 만났기에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귀엽네.” 문제는 아무래도 나인 것 같다. 나만 없으면 저렇게나 귀엽고 사랑스럽게 둘이 꽁냥거리는데……. 내가 있으면 아이들의 상태가 조금은 묘했다. “언니야!!”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던 두 아이는 티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빠르게 달려왔다. “잘 잤어, 샤샤? 르델로.” “응! 언니야!” “뭐…… 잘 잤지.” “이제는 나 없어도 둘이 잘 지내네?” 예뻐 보여서 한 말인데 두 아이들이 동시에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거든!” “내가 왜 얘랑 잘 지내. 토끼 같은 게. 동물이랑은 친하게 지낼 마음 조금도 없거든?” “나도 저 돼지랑은 안 친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을 보니, 조금은 한숨이 나왔다. 아니 방금 전까지 서로 베개도 해 주고, 엄청 사이 좋았잖아. 그런데 왜, 도대체 왜! ‘내가 없어야 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 아이들의 성격 형성에 나라는 존재가 문제인 걸까. “하…….” “가도록 하지.”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리안드로는 이때다 싶었던 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딜요?” “내가 어딜 가자고 할 때마다 그대는 그리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이더군. 내가 몹쓸 데라도 데려갈 줄 아나?” 네. 혹시 모르잖아요. 익숙해지려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황제님이셔서요. “벨라. 점심에 금붕어를 먹은 건가?” “네?” “단기 기억 상실이 아니고서야 까먹는 게 신기해서 말이지. 내가 분명 도서관에 가자고 말했을 텐데.” “아아!” 아니. 다른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아주 잠깐 잊었죠. 아주 잠깐. 나는 어색하게 그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요새 정신이 없네요.” “그래 보인다. 벨라. 토끼들이랑 운동은 하고 있는 건가? 건강이 점점 나빠지는 거 같아.” “하기는 해요! 토끼들 운동시킬 겸!”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 대부분 하고 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뭐 바구니에 넣는 정도는 내가 하고 있으니까 완벽하게 안 하는 건 아니지.’ 당당하게 어깨를 편 나는 리안드로를 빤히 바라봤다. “뭐…… 그렇다고 하니, 할 말은 없군. 하지만 건강이 좋아 보이진 않아. 다음에 궁의를 보낼 테니 진료를 받아 보도록. 또 볏짚처럼 픽 쓰러지지 말고.” “네.” “생긴 건 안 쓰러지게 생겼으면서, 왜 이다지도 약한 건지. 쯧.” 아니. 안 쓰러지게 생긴 건 또 뭐야. 물론 지금껏 살면서 쓰러져 본 적은 없다만…….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하는 동안 친구들은 픽픽 쓰러지는데 난 끝까지 살아남았다. ‘아는데 꼭 저렇게 말을 해야 하냐고.’ 괜스레 기분이 상한 나는 샤샤의 손을 잡았다. “아이들 데려가도 되죠?” “그래. 황궁의 모든 곳은 다 가도 된다. 북쪽의 별궁을 제외하곤.” 혹여나 섭섭해할까 싶어, 르델로의 손도 냉큼 잡았다. “거긴 뭐가 있는데요?” “굳이 보지 않아도,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다. 정 가고 싶다면 가도록 허락은 하겠지만,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거야.” “좋은 소리라니.” 누군가 그곳에 산다는 건가? ‘저렇게 말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겠지.’ 선황제겠지. 황후가 될 나에게 유일하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저 그곳은 없는 곳이라 생각하도록.” “네.” “그외의 곳은 언제든 다녀도 된다. 켄과 론이 호위로 붙을 거니 편하게 움직이도록.” “네.” 그들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으나, 우리가 별궁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켄이 붙는 바람에 물어볼 새도 없었다. ‘또 론이 안 보이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론에게 이야기하자고 해 놓고 까맣게 잊어버렸네. 세헬루스가 오던 날, 이야기하자 했는데.’ 나도 정신을 빼놓고 사나 보다. 공수표를 날려 버렸네. 하도 저 인간이 정신없게 한 탓이야. 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앞서가는 리안드로를 바라봤다. “그런데 저와 아이들이 이렇게 편하게 움직여도 괜찮은 건지…….” “문제 될 게 있나?” 네 많이 되죠. 정식으로 황후로 삼는다는 황명이 내려온 것도 아닌 상태에서 황궁에서 사는 여자 한 명. 황제의 아들 같지만 정식적으로 발표된 게 없는 남자아이 한 명. 황제와는 관련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여자아이 한 명. 완벽하게 황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들의 조합이었다. 한발 늦게 내 쪽을 바라보던 그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군.” “네. 보다시피.” “황궁 내부의 사용인들은 어차피 세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태니까. 맘껏 활보해도 된다.” “황제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편하게 다녀야겠네요.” 그리 편할 거라고 생각이 들진 않지만. 어찌 되었든 그가 그렇다니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그래. 누군가 불만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도록 해. 이참에 싹 갈아 버릴 테니.” 어쩐지 나를 통해, 아니 우리를 통해 리안드로가 원하는 스타베팅 이루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 팍 들었다. 공식적인 발표를 미루는 것도 그것의 일종이라는 생각마저 들고. 그러는 사이 우리는 별궁을 나와 본궁에 당도했다. 르델로를 처음 만난 곳이었다. 르델로도 본궁 어딘가에 산다지? 어디인지 가 본 적은 없으나 아마 황제의 침소와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낼 것이다. 우선 아이를 지켜야 할 테니까. 우리가 가는 곳은 아마도 본궁은 아닌 듯했다. 본궁을 지나쳐 작은 정원이 나왔고 그곳을 지나치자 또 다른 건물이 나왔다. 까딱 잘못하면 헤맬 것처럼 궁의 크기는 컸다. 위치는 본궁 기준 북쪽에 위치해 있는 곳. 하지만 황궁과 어울리지 않는 외딴 건물 하나였다. 마탑의 축소본 같은 느낌이랄까? “여기가 황실 도서관이다.” “아…….” 푸르른 나무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고, 돌로 만들어진 길 끝에 허름한 문이 있었다. “여기가 도서관이에요?” 생각보다 협소한 크기에 조금 아쉬움이 몰려왔다. “그래. 옛 선조께서 만드신 곳이지. 보기와 달리 안의 크기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만든 도서관이라서.” “오…….” 그 말과 함께 황제는 문을 열었다. 끼이익거리는 스산한 소리를 내며 열린 문. 그리고 밖에서 보았던 협소한 모습과 달리 그 안은 어마어마했다. 별궁의 모든 방을 터서 비교해도 여기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크기가 거대했다. 끝도 모르고 올라가 있는 천장. 책장들이 균일하게 놓여진 곳이었다. “크네요.” “와!” “우와…….” 샤샤와 르델로가 차례로 목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엄청 높은데 책이 많아요!” 마탑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겉보기에는 작으나 생각보다 거대했던 마탑과 비슷했다. 보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는 느낌이 말이다. “그러게. 정말 크다……. 그런데 리안.” “그래. 엄청나지?” “네. 엄청난데……. 그건 그런데 저 위에 있는 책들은 어떻게 꺼내요?” 문득 든 궁금증이었다. “아, 저 위에 있는 책들.” 3층짜리 건물로 만들어진 황실 도서관이었지만 계단이 있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벽에는 책장이 착 붙어 있었고, 그곳에도 책이 꽂혀 있었다. “장식용이다.”